볼티모어 스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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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티모어 스타즈는 1982년 창단된 USFL 소속 미식축구팀으로, 필라델피아를 연고지로 1983년부터 1984년까지, 1985년에는 볼티모어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활동했다. 1983년과 1984년 리그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으며, 1985년 USFL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85년 시즌 종료 후 USFL이 해체되면서 팀도 해체되었다. 켈빈 브라이언트, 스콧 피츠키, 척 푸시나 등이 주요 선수로 활약했으며, 짐 모라가 감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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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 스타즈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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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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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 1982년 |
해체 | 1986년 |
도시 | 칼리지파크, 메릴랜드주 |
상징색 | 진홍색, 올드 골드, 하양 |
홈구장 | 베테랑스 스타디움 (1983년–1984년), 프랭클린 필드 (1984년 포스트시즌), 버드 스타디움 (1985년) |
구단 정보 | |
리그 | 미국 축구 리그 (1983년–1985년) |
콘퍼런스 | 동부 콘퍼런스 (1984년–1985년) |
디비전 | 애틀랜틱 디비전 (1983년–1984년) |
구단 역사 | 필라델피아 스타즈 (1983년–1984년) 볼티모어 스타즈 (1985년) |
리그 우승 횟수 | 2회 (1984년, 1985년) |
콘퍼런스 우승 횟수 | 2회 (1984년, 1985년) |
디비전 우승 횟수 | 2회 (1983년, 1984년) |
플레이오프 진출 횟수 | 3회 (1983년, 1984년, 1985년) |
소유 및 경영 | |
구단주 | 밀레스 타넨바움 |
코칭 스태프 | |
감독 | 짐 모라 (1983년) |
2. 창단
1982년 5월 11일, 리그 소유주이자 골동품 상인인 데이비드 딕슨이 USFL의 출범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1] 리그의 필라델피아 팀은 부동산 개발업자인 마일스 H. 테넌바움이 소유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이탈리안 스탤리온"이라는 별명을 가진 록키 발보아를 기리기 위해 팀 이름을 스탤리온스(Stallions)로 정하려 했다. 하지만 버밍햄 스탤리온스 팀이 이 이름을 먼저 사용하게 되면서, 테넌바움은 팀 이름을 "스타즈(Stars)"로 결정했다.[18]
1982년 5월 11일, USFL의 출범이 리그 창립자이자 골동품 상인인 데이비드 딕슨에 의해 공식 발표되었다.[1] 리그의 필라델피아 프랜차이즈는 부동산 개발업자인 마일스 H. 테넌바움이 소유하게 되었다. 테넌바움은 처음에는 영화 캐릭터 록키 발보아의 별명 "이탈리안 스탤리언"을 따 팀 이름을 스탤리언스(Stallions)로 짓고 싶어 했으나, 버밍햄 팀이 해당 이름을 먼저 사용하게 되면서 "스타즈"(Stars)로 결정했다.[18]
1982년 7월, 조지 퍼레스가 팀의 초대 헤드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전에 NFL의 피츠버그 스틸러스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으나, 스타즈에서 단 한 경기도 지휘하지 않고 미시간 주립 대학교의 헤드 코치직을 맡기로 결정했다. 이후 1983년 1월 15일, 스타즈는 짐 모라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고용했다.[2]
3. 필라델피아 스타즈 (1983-1984)
NFL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어시스턴트 코치였던 조지 퍼레스가 1982년 7월 팀의 초대 헤드 코치로 임명되었으나, 스타즈에서 한 경기도 지휘하지 않고 미시간 주립 대학교 감독직을 맡기 위해 떠났다. 이후 1983년 1월 15일, 스타즈는 짐 모라를 새로운 헤드 코치로 고용했다.[2]
스타즈는 USFL의 첫 시즌인 1983년부터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했으며, 베테랑스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다. 첫 시즌에 리그 최고 성적인 15승 3패를 기록하며 USFL 챔피언십 게임에 진출했으나, 미시간 팬서스에게 22-24로 패배했다.[6] 팀의 강력한 수비진은 "도그하우스 수비"(Doghouse Defense)로 불렸다. 뛰어난 경기력에도 불구하고 첫 시즌 평균 관중은 18,650명에 그쳤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1974년 월드 풋볼 리그의 필라델피아 벨 팀과 관련된 입장권 스캔들에 대한 지역 팬들의 부정적인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18]
1984년 USFL 시즌에도 스타즈는 필라델피아에 연고를 두었지만, MLB 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일정 문제로 포스트시즌 홈 경기는 인근의 프랭클린 필드에서 치러야 했다. 스타즈는 해당 시즌에도 16승 2패라는 리그 최고 성적을 거두었고, 7월 15일 탬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USFL 챔피언십 경기에서 애리조나 랭글러스를 23-3으로 꺾고 마침내 우승을 차지했다.[12][13] 이는 필라델피아 이글스가 슈퍼볼 LII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필라델피아 연고 프로 미식축구팀이 거둔 마지막 메이저 리그 우승이었으며, 1960년 NFL 챔피언십 경기 이후 첫 우승이기도 했다. 팀의 성공과 함께 팬들의 관심도 높아져 1984년 평균 홈 관중은 28,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14]
리그 챔피언십 우승 후인 7월 21일, 스타즈는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탬파베이 반디츠와 포스트시즌 시범 경기를 치러 24-21로 승리했다.[15][16][17]
3. 1. 1983 시즌
스타스는 USFL의 첫 1983년 시즌에 필라델피아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베테랑스 스타디움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 정규 시즌에서 리그 최고 성적인 15승 3패를 기록했고, 강력한 "도그하우스 수비"(Doghouse Defense)는 18경기 동안 단 204점만을 허용하며 리그 역사상 최소 실점 기록을 세웠다. 팀의 주요 선수로는 쿼터백 척 푸시나(1978년 Heisman 트로피 준우승자), 와이드 리시버 스콧 피츠키,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신인 하프백 켈빈 브라이언트, UCLA 출신의 신인 공격 태클 어브 이트먼, 신인 라인배커 샘 밀스, 2년차 세이프티 스콧 워너 등이 있었다. 또한 타우슨 출신의 올스타 신인 펀터 숀 랜데타도 팀에 포함되어 있었다. 정규 시즌 종료 후, 브라이언트는 AP통신 선정 USFL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3]
스타스는 플레이오프에 1번 시드로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조지 앨런 감독이 이끌던 우승 후보 시카고 블리츠를 상대로 7번의 턴오버에도 불구하고 4쿼터 21점 차의 열세를 극복하고 연장 접전 끝에 44–38로 승리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4][5] 그러나 7월 17일 덴버의 마일 하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USFL 챔피언십 게임에서는 짐 스탠리 감독의 미시간 팬서스에게 22-24로 아쉽게 패배했다.[6] 이 경기에서도 스타스는 4쿼터 시작 시 3-17로 뒤졌으나 막판 맹렬한 추격을 펼쳤다.[7][8]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스타스, 팬서스, 블리츠가 NFL에 근접한 전력을 갖춘 팀들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흥행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는데, 경기당 평균 관중은 18,650명에 그쳤다. 이는 좋지 않은 날씨 탓도 있었지만, 1974년 월드 풋볼 리그 소속이었던 필라델피아 벨의 대규모 입장권 스캔들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필라델피아 팬들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당시 벨은 첫 두 홈 경기 관중 수를 12만 명 이상으로 발표했으나, 실제 유료 관중은 1만 9천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무료 또는 대폭 할인된 티켓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18]
주 | 요일 | 날짜 | 상대 | 결과 | 기록 | TV | 경기장 | 관중 |
---|---|---|---|---|---|---|---|---|
정규 시즌 | ||||||||
1 | 일요일 | 3월 6일 | at 덴버 골드 | 승 13–7 | 1–0 | ABC | 마일 하이 스타디움 | 45,102 |
2 | 일요일 | 3월 13일 | 뉴저지 제너럴스 | 승 25–0 | 2–0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38,205 |
3 | 월요일 | 3월 21일 | at 버밍햄 스탤리온스 | 승 17–10 | 3–0 | ESPN | 리전 필드 | 12,850 |
4 | 일요일 | 3월 27일 | 탬파베이 밴디츠 | 패 22–27 | 3–1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18,718 |
5 | 일요일 | 4월 3일 | 워싱턴 페더럴스 | 승 34–3 | 4–1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14,576 |
6 | 일요일 | 4월 10일 | at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 승 17–3 | 5–1 |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 18,671 | |
7 | 토요일 | 4월 16일 | at 오클랜드 인베이더스 | 승 17–7 | 6–1 | ESPN | 오클랜드-알라메다 카운티 콜리세움 | 34,901 |
8 | 일요일 | 4월 24일 | 보스턴 브레이커스 | 승 23–16 | 7–1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10,257 |
9 | 토요일 | 4월 30일 | at 탬파베이 밴디츠 | 승 24–10 | 8–1 | ESPN | 탬파 스타디움 | 41,559 |
10 | 일요일 | 5월 8일 | 덴버 골드 | 승 6–3 | 9–1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14,306 |
11 | 일요일 | 5월 15일 | 시카고 블리츠 | 승 31–24 | 10–1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25,251 |
12 | 일요일 | 5월 22일 | at 애리조나 랭글러스 | 승 24–7 | 11–1 | 선 데빌 스타디움 | 18,151 | |
13 | 일요일 | 5월 29일 | at 보스턴 브레이커스 | 패 17–21 | 11–2 | ABC | 니커슨 필드 | 15,668 |
14 | 일요일 | 6월 5일 | 미시간 팬서스 | 승 29–20 | 12–2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19,727 |
15 | 일요일 | 6월 12일 | at 뉴저지 제너럴스 | 승 23–9 | 13–2 | 자이언츠 스타디움 | 32,521 | |
16 | 월요일 | 6월 20일 | 오클랜드 인베이더스 | 승 12–6 | 14–2 | ESPN | 베테랑스 스타디움 | 16,933 |
17 | 일요일 | 6월 26일 | 버밍햄 스탤리온스 | 승 31–10 | 15–2 | 베테랑스 스타디움 | 17,973 | |
18 | 일요일 | 7월 3일 | at 워싱턴 페더럴스 | 패 14–21 | 15–3 | RFK 스타디움 | 11,039 | |
플레이오프 | ||||||||
디비전 플레이오프 | 토요일 | 7월 9일 | 시카고 블리츠 | 승 44–38 (OT) | —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15,686 |
USFL 챔피언십 | 일요일 | 7월 17일 | vs. 미시간 팬서스 | 패 22–24 | — | ABC | 마일 하이 스타디움 | 50,906 |
3. 2. 1984 시즌
볼티모어 스타즈는 1984년 USFL 시즌에도 필라델피아에 남았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일정 충돌 문제로 인해 포스트 시즌 홈 경기를 프랭클린 필드에서 치러야 했다. 스타즈는 정규 시즌에서 리그 최고 성적인 16승 2패를 기록하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후 7월 15일 탬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그 챔피언십 경기에서는 조지 앨런 감독이 이끄는 애리조나 랭글러스를 23-3으로 완파하고 우승을 차지했다.[12][13] 이 우승은 필라델피아 이글스가 슈퍼볼 LII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필라델피아 연고 프로 미식축구팀이 거둔 마지막 메이저 챔피언십 우승이었으며, 1960년 NFL 챔피언십 경기 이후 처음이었다. 스타즈의 인기는 팬들 사이에서 점차 높아져, 홈 경기 평균 관중 수는 1983년 약 18,000명에서 1984년에는 28,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14]리그 챔피언십 우승 후, 스타즈는 7월 21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탬파베이 반디츠와 이례적인 포스트 시즌 시범 경기를 가졌고, 이 경기에서 24-21로 승리했다.
주차 | 요일 | 날짜 | 상대 | 결과 | 전적 | TV | 경기장 | 관중 수 |
---|---|---|---|---|---|---|---|---|
프리시즌 | ||||||||
1 | 휴식 | |||||||
2 | ||||||||
3 | 토요일 | 2월 11일 | vs. 뉴저지 제너럴스 | 패 20–28 | 0–1 | 델랜드, 플로리다 | ||
4 | 토요일 | 2월 18일 | vs. 탬파베이 반디츠 | 패 17–22 | 0–2 | 올랜도, 플로리다 | ||
정규 시즌 | ||||||||
1 | 일요일 | 2월 26일 | at 멤피스 쇼보츠 | 승 17–9 | 1–0 | 리버티 볼 기념 경기장 | 28,098 | |
2 | 일요일 | 3월 4일 | at 워싱턴 페더럴스 | 승 17–6 | 2–0 | RFK 스타디움 | 12,067 | |
3 | 일요일 | 3월 11일 | at 뉴저지 제너럴스 | 패 14–17 | 2–1 | ABC | 자이언츠 스타디움 | 46,716 |
4 | 일요일 | 3월 18일 | 오클랜드 인베이더스 | 승 28–7 | 3–1 | 베테랑스 스타디움 | 30,284 | |
5 | 토요일 | 3월 24일 | at 피츠버그 몰러스 | 승 25–10 | 4–1 | ESPN | 쓰리 리버스 스타디움 | 24,341 |
6 | 일요일 | 4월 1일 | 탬파베이 반디츠 | 승 38–24 | 5–1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30,270 |
7 | 일요일 | 4월 8일 | at 애리조나 랭글러스 | 승 22–21 | 6–1 | ABC | 선 데빌 스타디움 | 30,252 |
8 | 일요일 | 4월 15일 | 시카고 블리츠 | 승 41–7 | 7–1 | 베테랑스 스타디움 | 17,417 | |
9 | 일요일 | 4월 22일 | at 샌안토니오 건슬링거스 | 승 24–10 | 8–1 | ABC | 알라모 스타디움 | 16,590 |
10 | 금요일 | 4월 27일 | 뉴올리언스 브레이커스 | 승 35–0 | 9–1 | 베테랑스 스타디움 | 34,011 | |
11 | 일요일 | 5월 6일 | at 버밍햄 스탤리언스 | 승 43–11 | 10–1 | ABC | 리전 필드 | 49,500 |
12 | 일요일 | 5월 13일 |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 승 18–14 | 11–1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22,391 |
13 | 토요일 | 5월 19일 | 잭슨빌 불스 | 승 45–12 | 12–1 | ESPN | 베테랑스 스타디움 | 33,194 |
14 | 일요일 | 5월 27일 | at 미시간 팬서스 | 승 31–13 | 13–1 | ABC | 폰티악 실버돔 | 20,387 |
15 | 월요일 | 6월 4일 | 피츠버그 몰러스 | 승 23–17 | 14–1 | ESPN | 베테랑스 스타디움 | 30,102 |
16 | 금요일 | 6월 8일 | at 덴버 골드 | 승 21–19 | 15–1 | 마일 하이 스타디움 | 30,755 | |
17 | 금요일 | 6월 15일 | 워싱턴 페더럴스 | 승 31–8 | 16–1 | 베테랑스 스타디움 | 22,582 | |
18 | 일요일 | 6월 24일 | 뉴저지 제너럴스 | 패 10–16 | 16–2 | ABC | 베테랑스 스타디움 | 37,758 |
플레이오프 | ||||||||
디비전 플레이오프 | 토요일 | 6월 30일 | 뉴저지 제너럴스 | 승 28–7 | — | ABC | 프랭클린 필드 | 19,038 |
컨퍼런스 챔피언십 | 일요일 | 7월 8일 | 버밍햄 스탤리언스 | 승 20–10 | — | ABC | 프랭클린 필드 | 26,616 |
USFL 챔피언십 | 일요일 | 7월 15일 | vs. 애리조나 랭글러스 | 승 23–3 | — | ABC | 탬파 스타디움 | 52,662 |
포스트시즌 전시 | ||||||||
전시 | 토요일 | 7월 21일 | vs. 탬파베이 반디츠 | 승 24–21 | — | ESPN | 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 | 21,000 |
4. 볼티모어 스타즈 (1985)
필라델피아 스타즈는 USFL의 1985년 시즌을 앞두고 리그의 가을 시즌 전환 결정과 필라델피아 내 홈 경기장 확보 문제 등으로 인해[18] 볼티모어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볼티모어 스타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볼티모어에서도 즉시 홈구장을 확보하지 못해 시즌 초반에는 메릴랜드 대학교의 버드 스타디움을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해야 했다.[18][21]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스타즈는 1985 시즌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뉴저지주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USFL 챔피언십 경기에서 오클랜드 인베이더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22][23] 그러나 USFL이 NFL과의 반독점 소송에서 사실상 패소하면서 리그 운영을 중단함에 따라,[24][25] 1985년은 볼티모어 스타즈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4. 1. 연고지 이전 배경
리그 구단주들은 뉴저지 제너럴스의 도널드 트럼프를 중심으로 1985 시즌 이후 가을 시즌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스타즈는 필라델피아에서의 입지가 어려워졌다. 구단주 타넨바움에 따르면,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베테랑스 스타디움을 공유했기 때문에 1986 시즌 초반 원정 경기를 치러야 했으며, 만약 필리스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면 11월까지 홈 경기를 열 수 없는 상황이었다.[18] USFL의 가을 시즌 계획으로 인해 토요일에는 펜 퀘이커스 풋볼 팀이 경기를 치르는 프랭클린 필드를 사용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필라델피아의 다른 유일한 풋볼 경기장은 베테랑스 스타디움 옆의 존 F. 케네디 스타디움이었으나, 60년 된 이 경기장은 관리 부실로 상태가 좋지 않았고 4년 뒤 철거될 예정이었다. 또한 10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는 USFL의 관중 규모를 고려할 때 적합하지 않았다.당시 필라델피아 이글스는 구단주 레너드 토즈의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스타즈가 NFL 팀을 도시 밖으로 밀어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토즈는 이글스를 버팔로 빌스와 맞바꾸거나 애리조나로 이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 시 당국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글스를 명백히 선호하며 팀을 잔류시키는 데 기여했다.[19]
델라웨어 밸리 내에 임시로 사용할 만한 적합한 경기장이 없었기 때문에, 타넨바움은 3년 전 NFL 콜츠를 잃고 상심이 컸던 볼티모어로 팀 이전을 결정했다. 실제로 스타즈 이전 준비 과정에서 볼티모어 시는 구단주 로버트 어세이로부터 공용 수용 절차를 통해 콜츠를 되찾으려 시도하기도 했다.[18][20]
초기에는 피츠버그 몰러스와의 합병을 통해 팀을 강화할 계획도 있었다. 몰러스 구단주 에드워드 J. 데바톨로 시니어는 피츠버그 스틸러스와의 경쟁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한 시즌 만에 팀을 해체한 상태였다. 그는 처음에는 소액 주주로 스타즈에 합류하는 데 동의했으나, 곧 완전 철회를 결정했다.[18]
볼티모어는 스타즈를 열렬히 환영했다. 타넨바움은 즉시 볼티모어의 유력 라디오 방송국인 WBAL과 중계 계약을 맺었고, 당시 시장 윌리엄 도널드 셰이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반대로 1986년까지 볼티모어의 메모리얼 스타디움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보도에 따르면, 오리올스 단장 행크 피터스와 감독 조 알토벨리는 스타즈가 경기장 잔디를 손상시킬 것을 우려했고, 구단주 에드워드 베넷 윌리엄스를 설득하여 스타즈의 경기장 사용을 막았다.[18] 임시로 사용할 다른 경기장이 볼티모어 지역에 없었기 때문에, 타넨바움은 메릴랜드 대학교의 버드 스타디움에서 홈 경기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칼리지 파크는 볼티모어에서 남서쪽으로 약 46.67km 떨어진 워싱턴 D.C. 교외 지역이었다. (공교롭게도 워싱턴의 USFL 팀이었던 페더럴스 역시 같은 시즌에 올랜도 레니게이즈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이 시기는 워싱턴 레드스킨스가 1983년 1월과 1984년 슈퍼볼에 진출하는 등 성공을 거두던 때라 상황은 더욱 복잡했다. 더욱이 팀 운영 본부는 필라델피아에 그대로 두고 경기 때마다 칼리지 파크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스타즈는 리그의 마지막 봄 시즌 동안 18번의 원정 경기를 치른 셈이었다.[21]
4. 2. 1985 시즌
연고지 이전의 여파로 스타즈는 1985년 시즌 초반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마지막 13경기 중 9경기를 승리하며 와일드카드 자리를 확보했다. 하지만 홈 경기는 대부분 관중이 적은 버드 스타디움에서 치러졌다. 볼티모어 지역 팬들은 2년 만에 프로 풋볼이 돌아온 것을 환영했지만, 스타즈 경기를 보기 위해 95번 주간고속도로를 따라 35분 거리에 있는 경기장까지 가는 것을 주저했다. 많은 팬들은 팀이 1년 뒤 시내의 유서 깊은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시작하기를 기다렸다.이로 인해 관중 수가 급감했고, 스타즈는 승리 기록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홈 경기 개최권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리그 전반의 관중 감소에 우려를 표한 ABC 스포츠는 구단주 어셔에게 관중 없는 경기장에서 열리는 플레이오프 경기를 중계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ABC는 USFL과의 계약 구조상 리그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셔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스타즈는 연승을 거두며 유리한 고지에 있던 뉴저지 제너럴스와 버밍햄 스탤리언스를 연달아 꺾고, 뉴저지주의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스타즈는 바비 허버트가 이끄는 오클랜드 인베이더스를 28-24로 물리치고 USFL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22][23] 우승 직후, 구단주 타넨바움은 동료 부동산 개발업자인 스티븐 로스에게 팀의 지배 지분을 매각했다.[18]
결과적으로 이 경기는 USFL 역사상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1986년 7월 29일, 연방 대배심은 USFL이 NFL을 상대로 제기한 반독점 소송에서 USFL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손해 배상액으로 단 1USD만을 평결했다. 이는 반독점법에 따라 세 배인 3USD로 증액되었다.[24][25] 필라델피아에서의 리그 철수는 불리한 배심원 평결에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였다. 배심원장은 NFL이 독점이라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손해 배상액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배심원단은 법을 잘못 해석하여 1USD의 명목상 손해 배상액을 결정했고, 담당 판사가 이를 수정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판사는 배심원단이 결정한 금액을 변경할 권한이 없었다. 이 판결로 인해 리그는 다음 날 운영을 중단했고, 다시는 경기가 열리지 못했다.
한편, 1985년 시즌 동안 등번호 19번은 볼티모어 콜츠의 위대한 선수였던 조니 유니타스를 기리기 위해 어떤 선수에게도 배정되지 않았다.
주차 | 요일 | 날짜 | 상대 | 결과 | 기록 | TV | 경기장 | 관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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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시즌 | ||||||||
1 | 토요일 | 2월 2일 | vs. 올랜도 레니게이드스 | 패 10–16 | 0–1 | 스펙 마틴 스타디움, 델랜드, 플로리다 | 300 | |
2 | 토요일 | 2월 9일 | vs. 멤피스 쇼보츠 | 승 14–9 | 1–1 | 윈터 헤이븐, 플로리다 | ||
3 | 토요일 | 2월 16일 | vs. 탬파베이 밴디츠 | 패 26–28 | 1–2 | WTOG | 샬럿, 노스캐롤라이나 | 20,000 |
정규 시즌 | ||||||||
1 | 일요일 | 2월 24일 | at 잭슨빌 불스 | 패 14–22 | 0–1 | 게이터 볼 스타디움 | 51,045 | |
2 | 일요일 | 3월 3일 | at 오클랜드 인베이더스 | 무 17–17 (OT) | 0–1–1 | 오클랜드-알라메다 카운티 콜리세움 | 20,495 | |
3 | 토요일 | 3월 9일 | at 멤피스 쇼보츠 | 패 19–21 | 0–2–1 | ESPN | 리버티 볼 메모리얼 스타디움 | 37,466 |
4 | 일요일 | 3월 17일 | 뉴저지 제너럴스 | 승 29–9 | 1–2–1 | ABC | 버드 스타디움 | 31,026 |
5 | 일요일 | 3월 24일 | 버밍햄 스탤리언스 | 패 3–7 | 1–3–1 | 버드 스타디움 | 14,529 | |
6 | 일요일 | 3월 31일 | at 휴스턴 갬블러스 | 승 27–14 | 2–3–1 | ABC | 휴스턴 애스트로돔 | 24,166 |
7 | 일요일 | 4월 7일 | at 로스앤젤레스 익스프레스 | 승 17–6 | 3–3–1 | ABC |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 5,637 |
8 | 일요일 | 4월 14일 | 멤피스 쇼보츠 | 패 10–13 | 3–4–1 | ABC | 버드 스타디움 | 15,728 |
9 | 일요일 | 4월 21일 | 포틀랜드 브레이커스 | 승 26–17 | 4–4–1 | 버드 스타디움 | 14,832 | |
10 | 일요일 | 4월 28일 | at 탬파베이 밴디츠 | 패 14–29 | 4–5–1 | 탬파 스타디움 | 41,226 | |
11 | 일요일 | 5월 5일 | 애리조나 아웃로스 | 승 24–19 | 5–5–1 | 버드 스타디움 | 14,432 | |
12 | 일요일 | 5월 12일 | at 뉴저지 제너럴스 | 패 3–10 | 5–6–1 | ABC | 자이언츠 스타디움 | 34,446 |
13 | 금요일 | 5월 17일 | at 올랜도 레니게이드스 | 승 34–21 | 6–6–1 | ESPN | 플로리다 시트러스 볼 | 23,121 |
14 | 일요일 | 5월 26일 | 샌안토니오 건슬링거스 | 승 28–10 | 7–6–1 | 버드 스타디움 | 8,633 | |
15 | 일요일 | 6월 2일 | 잭슨빌 불스 | 승 17–12 | 8–6–1 | ABC | 버드 스타디움 | 9,663 |
16 | 토요일 | 6월 8일 | at 버밍햄 스탤리언스 | 패 7–14 | 8–7–1 | ESPN | 레지온 필드 | 24,300 |
17 | 토요일 | 6월 15일 | 올랜도 레니게이드스 | 승 41–10 | 9–7–1 | 버드 스타디움 | 6,988 | |
18 | 일요일 | 6월 23일 | 탬파베이 밴디츠 | 승 38–10 | 10–7–1 | 버드 스타디움 | 12,647 | |
포스트시즌 | ||||||||
쿼터 파이널 | 월요일 | 7월 1일 | at 뉴저지 제너럴스 | 승 20–17 | — | 자이언츠 스타디움 | 26,982 | |
준결승 | 일요일 | 7월 7일 | at 버밍햄 스탤리언스 | 승 28–14 | — | ABC | 레지온 필드 | 23,250 |
USFL 챔피언십 | 일요일 | 7월 14일 | vs. 오클랜드 인베이더스 | 승 28–24 | — | ABC | 자이언츠 스타디움 | 49,263 |
5. 해체
이전의 연고지 이전으로 인해 스타즈는 1985년 시즌 초반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지막 13경기 중 9경기를 승리하며 와일드카드로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경기는 대부분 관중이 거의 없는 버드 스타디움에서 치러졌다. 볼티모어 지역 팬들은 2년 만에 프로 풋볼이 돌아온 것을 환영했지만, 스타즈의 경기를 보기 위해 95번 주간고속도로를 따라 35분이나 운전하는 것을 꺼렸다. 대부분의 팬들은 팀이 다음 해에 도시의 유서 깊은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결과적으로 관중 수가 급감하면서, 스타즈는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 홈 경기 개최권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리그 중계권을 가진 ABC 스포츠는 리그 전반에 걸쳐 관중이 줄어드는 상황에 난색을 표하며, 해리 어셔 커미셔너에게 텅 빈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플레이오프 경기를 중계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ABC는 USFL과의 계약 구조상 리그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어셔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타즈는 플레이오프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던 뉴저지 제너럴스와 버밍햄 스탤리온스를 연달아 꺾고 뉴저지주의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USFL 챔피언십 경기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스타즈는 바비 허버트가 이끄는 오클랜드 인베이더스를 28-24로 꺾고 USFL 타이틀을 차지했다.[22][23] 우승 직후, 구단주 마일스 타넨바움은 동료 부동산 재벌인 스티븐 로스에게 구단 지배 지분을 매각했다.[18]
결과적으로, 이 챔피언십 경기는 USFL에서 마지막으로 치러진 경기가 되었다. 1986년 7월 29일, 연방 대배심은 USFL이 NFL을 상대로 제기한 반독점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손해 배상금으로는 단 1USD만을 평결받았다. 이는 반독점법 규정에 따라 세 배인 3USD로 증액되었다.[24][25] 필라델피아에서 볼티모어로 연고지를 이전한 결정은 소송 과정에서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배심원장은 NFL이 독점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구체적인 손해액 산정에 대해서는 배심원단 내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배심원단은 법을 잘못 해석하여 상징적인 1USD 배상을 결정했고, 담당 판사가 이를 조정해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판사는 배심원단의 평결 금액을 임의로 변경할 권한이 없었다. 이 판결로 인해 재정적 타격을 입은 USFL은 다음 날 운영을 중단했고, 리그는 다시 열리지 못했다.
6. 주요 선수
스타즈는 여러 뛰어난 선수와 코칭 스태프를 보유했다. 팀의 핵심 선수로는 1978년 하이즈먼 트로피 준우승자였던 쿼터백 척 푸시나, 5년차 와이드 리시버 스콧 피츠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출신의 신인 하프백 켈빈 브라이언트, UCLA 출신의 신인 공격 태클 어브 이트먼, 신인 라인배커 샘 밀스, 2년차 세이프티 스콧 워너 등이 있었다. 특히 브라이언트는 1983년 USFL 시즌 종료 후 AP통신에 의해 USFL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3] 또한 타우슨 대학교 출신의 올스타 신인 펀터 숀 랜데타도 팀의 주요 선수였다.
팀의 수비진은 "도그하우스 수비"(Doghouse Defense)로 불렸으며, 1983년 USFL 시즌 18경기 동안 단 204점만을 허용하여 리그 역사상 최소 실점 기록을 세웠다.
훗날 내셔널 풋볼 리그(NFL)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선수들도 많았다. 샘 밀스는 뉴올리언스 세인츠와 캐롤라이나 팬서스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팬서스는 2005년 암으로 사망한 그의 등번호 5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숀 랜데타는 20년간 NFL 최고의 펀터 중 한 명으로 활약했으며, 2006년 은퇴 당시 NFL에서 활동하는 마지막 USFL 출신 선수였다. 센터 바트 오츠 역시 뉴욕 자이언츠와 샌프란시스코 49ers에서 활약하며 5번의 프로볼 선정 및 3개의 슈퍼볼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랜데타와 오츠는 뉴욕 자이언츠에서 함께 뛰며 1986년과 1990년 슈퍼볼 우승에 기여했다.
팀의 감독은 짐 모라 시니어가 3시즌 내내 맡았으며, 그는 이후 NFL의 뉴올리언스 세인츠와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감독을 역임했다. 단장은 칼 피터슨이 맡았는데, 그는 나중에 캔자스시티 치프스의 사장 겸 단장, CEO가 되었다.
다음은 시즌별 주요 기록이다.
부문 | 1983년 | 1984년 | 198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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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싱 야드 | 켈빈 브라이언트 (1,470) | 켈빈 브라이언트 (1,406) | 켈빈 브라이언트 (1,207) |
리시빙 야드 | 스콧 피츠키 (731) | 스콧 피츠키 (1,895) | 스콧 피츠키 (882) |
패싱 야드 | 척 푸시나 (2,718) | 척 푸시나 (3,837) | 척 푸시나 (3,496) |
인터셉션 | 스콧 워너 (8) | 마이크 러쉬 (7) | 마이크 러쉬 (10) |
색 (Sack) | 돈 필더 (8.5) | 조지 쿠퍼 (6) | 존 워커 (10) |
7. 역대 홈경기장
(볼티모어 시외곽)